이틀은 푹 쉬고 난 다음 발티트 포트(Baltit Fort)로 슬 슬 올라갔다.

 

 

 

어느 곳이던 왕들은 제일 좋은 곳에 터를 잡아 궁궐을 만드는 법,

 

마을에서 우러러 보인 곳이라 오르막을 올라 다니기 힘들 텐데

 왜 저 높은 곳에 왕궁을 세웠을까?’

 

외국인 관광객 보다 파키스탄 관광객들이 더러 오르고 있었다.

 

 

 

 가는 길은 오르기는 약간 힘드나

오래 되어 그 나름으로 옛 정취를 자아냈으며

여전히 훈자 사람들은 누구나 아는 체 말을 걸어 왔다.

 

발티트 포트

 

 

 

입구에 들어서면 내부에 들어 갈 수 있는 티켓을 우리 돈 6000원 가량 주고 구매 했는데

어떻게들 알고 한국 여라고 붙들고 사진 찍자 한다.

 

 

 

내부는 작으나마 내가 보아온 EBS 다큐멘터리에서 박물관이라 했는데 해설사가 있었다.

 

 

해설사(흰옷) 

액자 사진 푸른 옷 AD.1863~1886 왕  

 

 


수도인 이슬라마드에서 온 대학생들과 합류해 내부로 들어갔다.

 

 

 

나는 각 나라를 다닐 때 되도록 박물관을 간다.

박물관은 살아온 인류 역사의 발자취와 그들의 예술성,

지나온 과거의 역사 속에서 오늘날이 있기에 인류의 위대함을 보는 순간들이기에 되도록 들린다

 

각 나라별 박물관의 해설은 그 나라의 언어와 영어로 써여져 전혀 알아 볼 수 없어도

 내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훈자의 발티트 포트의 내부는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왕이 살았던 흔적을 보존하여 둔 것이었으며,

 유물들이 유리벽에 갇히어 있지 않고 

손으로 만 지고 냄새까지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손으로 만지지는 않았습니다) 

각 국 도시의 박물관들을 두로 보아 왔지만 훈자 발티트 포트의 내부는 잊혀 질 것 같지가 않았다.

 

 

 

2500m를 넘어가고 암벽과 설산으로 이어져 골짜기 비탈에 기대어 숨어 있으니,

지금까지 순수함을 간직 했으리라.

 

자그마한 성에서 그들의 삶의 흔적을 보면서 흥분이 되면서 훈자의 매력을 더 하였다, 

 

해설사는 이 높은 곳 성 안에 까지 물길을 끌어 올렸다는 곳을 보여 주었다,

(스리랑카의 돌 산 위의 시기리아도 그랬었지. 정말 대단 하였었다.) 

이슬라마드 온 대학생들과 함께 열심히 들었다.

(사실 알아 듣는 척 한 것이다.)

 

 

 

대학생들은 한국서 왔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나는 그들의 모델이 되어야 했다.



 

그 대학생들이 예상 보다 크게 한국을 얼마나 좋아 하는지 그대 들은 아실까

아마 수십 장의 사진은 더 찍었을 것 같다.

학생들은 우리네 강남 스타일 보다 뒤지지 않게 멋쟁이.

 

발티트 포트에서 내려 다본 훈자 넘어 풍광 

 

 

 

대학생들 숫자를 에어 보니 12명 이였는데 한 대학생당 한 장씩만 같이 찍어도 

12장인데 보통 5,6장은 찍어 댔다.

 

나는 졸지에 파키스탄 이슬라마드 대학생들과 함께한 발티트 포트 한국 사진 모델이 되었다.

 

 

 

숙소의 베란다에서 보았던 훈자의 풍광과는 한층 더 밝았으며 

역시 왕이 살려면 제일 좋은 곳에 터를 잡았던 모양이었다.

 

 

 

오후에 정리 할 것 좀 하고 베란다에 기대어 만년설을 보노라니

 숙소 아래 좁은 골목길에 백발을 휘날리는 노인네 4분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고,

양들 2마리가 있었는데 나를 올려다보더니

 

 

 

굿 에프터눈마담..!’

 

 

 

깜짝 놀란 나는 착각 속에 저 노인들이 어찌 저리 영어를 할까?

하면서 생각해 보니 이곳 사람들 모두 영어를 한다는 사실이다.

 

 

 

아 오케이탱큐.. 굿 에프 터 눈

 

하고 받아 쳤으나 더 말 하다간 나의 짧은 영어가 바닥날까 우물쭈물 하는데

노인들은 양 두 마리를 가리키며

 

데드

 

하면서 목을 손으로 쑥 긋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니까 저 양들이 오늘 죽는다는 말이군하면서

 

 

 

영어를 잘 못하는 나에게 계속 말을 걸어 올 것 같아

오 케이 안다 스텐.’ 

하면서 그들이 올려다 보이질 않게 얼른 뒤쪽으로 와 버렸다.

 

 

 

좀 있다 사진기를 찍으려고 가보니 모두들 가버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저 아래 동네에서 양 팔러온 노인네가 한분 계셨던 모양인데

 오늘 이곳 훈자 마을에서 결국은 못 팔고 가셨다.

 

 

 

내가 이곳 청년들과 드라이브 다녀 올 때 

그 노인네 분이 양 두 마리 끌고 큰 도로를 거슬러 올라가시는 모습을 본 것이다.

 

 

 

이 숙소에서 밤낮으로 카운터를 지키는 청년의 이름은 영민 이인데 

이전의 한국 여행객이 한국어로 영민 이라고 지어 주었다 하였고 

한국어도 가르쳐 주어 몇 마디는 할 줄 알고 있었다.

 

여행객들이 모두 나가고 없을 때 내가 거실에 앉아 있으면 분명한 한국말로

멍 때란다'하였다.

 

젊은 여행객들이야 산으로 들로 쏘다니지만 비탈로 이루어진 

이 마을을 마구 다닌 다는 것은 나에게 힘든 일이다.

 

 

 

오늘도 책과 컴퓨터에 있는 영화를 보고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영민 이가 드라이브 가잔다.

 

 

 

영민 이의 친구가 차를 가지고 온 것이다.

차는 아우디 이었으며영민 이의 친구는 이곳 사람들의 얼굴이라기보다는 동유럽 쪽의 미남 이였다.

 

 

 

휭하니 차를 타고 가는데 암벽화를 보여 준다.

 

이곳 훈자의 다큐 중 암벽화가 있었는데 앞면만 보였고 더 큰 것은 돌아가야 보인다 하였다.

 

암벽화-훈자에서 소스트 방향으로 가다가 첫 번쨰 다리 건너 

바로 왼쪽에 큰 길에서도 보임 

 

내가 훈자로 올 때는 중국 국경서부터 계속 아래로 내려오는 풍광을 보았기에 올라가면서

 보노라니 새로웠는데 차가 도로를 벗어나 비포장 길로 접어들었다.

 

 

 

차는 비포장 도로로 들어섰고 언덕위에 세워 졌다.

 이곳의 풍광은 더 새로웠다.

아마도 길깃 같은 도시의 주민들이 주로 쉬거나 놀 때 찾아오는 장소인 것 같았다.

 

 

숙소의 일꾼 영민이 


훈자에서 소스트 방향으로 가다가 암벽화 있는 곳

지나서 왼쪽으로 비포장 도로로 들어 가는 곳

훈자서 보는 곳 보다 더  멋 집니다.

.

앞 쪽과 오른 쪽의 양쪽에 만년설을 끼고 구름이 흘렀고

아래에는 철 철 넘처나는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으며 

바람은 감미로웠다.

 

 

 

돌아오는 길에 알리마바드에 들리어 야채와 빵계란음료수빵을 쌌으며 

차 안에서 빵과 캔은 나누어 먹었는데 빵은 이곳에서 보기 드물게 우리네 제과점 빵 같이 맛있었다.

 

이것은 오늘 그들이 나를 드라이브 시켜 준 보답 이였다.

 

 

 

이곳 물 이라고 부른다는데 설산에서 녹은 물이 바람과 석회질에 혼합하여 색깔은 회색이다.

 

산에서 수로를 연결하여 집집마다 이 물을 사용

물이 뿌옇고 회색, 가루 같은 이 물질이 둥 둥 떠 있음

 

 

 

 

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 물을 수로를 만들어 집집으로 연결하여 쓰는데 

이 물은 끌이지 않고 먹는다.

 

어찌 보면 흙 탕 물 같기도 하며 어찌 보면 세면트를 혼합한 것 같은데 

나는먹는 물은 생수를 사다 먹었으며

 밥 할 때은 사용하지 못하겠고

 양치 할 때도 께름칙하고 빨래 할 때도 영 석연찮다.

어쩌랴,

이곳에서는 모두들 잘 사용 하는데

소 옆집의 가장이 엊그제 배가 아파 갑자기 길깃의 병원으로 갔는데 담석이란다.

 

종원씨(먼저 이곳에 오신 우리네 젊은이)

의 말에 100m 정도 가면 공동 정수기 수도꼭지 달린 곳이 있는데 

오전 10시쯤부터 문을 열고 오후 일찌감치 닫는다 하여 

첫 날은 운 좋게 페트병에다 물을 받아 밥라면을 끓여 먹고 양치도 하였다.

 

 

 

숙소 주방 비를 하루 2,000원 주고 맘 것 사용 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아

야채 등을 싸다가 밥을 해 먹는데 

정수기의 물을 받아 밥을 하였으나

 둘째 날은 물통 여러 개를 들고 서너 번 가도 문을 잠궈놓았다.

 

 

 

다음 날 가보니 또 잠궈 있었다.

무슨 공동 정수기 물을 잠궈 놓을까? 

 

당연 그 앞에는 늘어지게 앉아 온갖  간섭 다하는 주민들이 있었기에

 

 

 

오푼 더 도얼

 

 

 

노 프라범’ 이라 답하는 훈자 사람들

 

 

 

물통을 흔들면서 난 물 받아 가야 겠다.

오픈 더 도얼화이 클로즈.?’

 

 

 

자꾸 외치니 두어 사람 더 모인다누군가 말하길

 

 

 

메어리즈

열쇠 가진 주인이 결혼식 갔단다.

 

 

 

가면 문 열어 놓고 가지 문은 왜잠그고 가냐?’ 

 

갑자기 한국말로 쏘아 붙이니.

이 착한 훈자 사람들어리둥절한 모양이다.

 

 

 

횐 오픈?’ 언제 문 열러어제도 닫았었고 오늘도 닫혀 있어. ‘

 

 

 

‘메이비... 더 왠지 스리 에이즈 캄 히얼.’


 

 

어쩌구 하는 말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 다는 소리 같았다.

 

 

 

종원씨는 이곳 물을 잘 먹는다.

나는 도저히 안 되겠기에 저녁 무렵 들어온 그에게 물 이야길 했더니 

숙소 오른 쪽 비탈길로 내려가면 병원이 있는데 

그곳에 또 하나의 정수기가 있다 하였다.

 

 

 

패트병 5개 들고 비탈길을 내려가서 물을 받아 오는데 가팔라 헐떡거렸다.

 

 

 

여행 와서 물 길러 다니는 내 꼴 이란!

 

 

 

그러면 훈자의 사람들은 장수한다는데 물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일까?

 

전분적인 과학자들이 물 성분을 조사한 내용을 보아야 하겠지만 

소현이 개인의 생각은

 

그들의 성격이다.

 

 

 

이곳에는 화가 없다

화 자체가 없으니 질투시기심이 없고 싸움도 없고 걱정이 없다.

 

눈물도 없을 것 같다.

뭔가 화를 내고 못 마땅하고 원통하면 눈물이 흐른다

때로는 괜스레 흐르기도 하고

지독히 주군가를 저주 하거나 미워 할 때도미치도록 사랑할 때도.

내 지은 죄를 사죄 해 달라고 신에게 빌때도 소리치고 울어 덴다


혼자 사람들의 성격은 그렇지 않다그들의 생활은

언제나 은은한 미소에느긋하며 모든 것이 그저 흘러가듯 여유롭다

 

 

 

그러한 성품이 장수촌을 이루 었다고 엉터리 여행가는 판단해 보았다.

 

 

 

훈자 사람들은 앞으로도 어떤 여행가들이 와서 어지럽게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 곳 나름의 풍광도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것도 있겠지만

그들의 성품에 매료되어 오는 여행객들이 있는 것이다.

 

 

 

이 숙소는 저녁 식사 끝 난 시간이면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슬 슬 마실 오신다.

 

숙소의 주인 할아버지는 훈자의 대표적 성격처럼 착하고

 성실하고 온화 했어 이 숙소에 오면 도저히 빠져 나가질 못한다.

 

 

 

영민 이의 형은 저녁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데 

어제 저녁도 나타나 핸드폰에 저장된 훈자의 사진들을 보여 주었다.

 

그 사진 들 중 내가 제일보고 싶어 했던 동물 눈 표범이 있었다.

 

봄에 EBS 다큐에서 소스트 국경 근처 우리 안에 눈 표범이 있는 장면을 보았었다.

 

대충의 내용은 어린 눈 표범이 에미를 잃고 죽어 가는 것을 데려다 

키우는데 크면 자연으로 돌려보낸다 하였다.

 

 

 

그들이 말하길 그 공원에 아직도 눈 표범이 있단다.

사진을 확대해서 보니 내가 보았던 다큐의 눈 표범 보다는 크 있었다.

 

 

 

그간 자랐으리라.

 

저 곳은 파키스탄 출입국 사무소를 넘어 중국 쪽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

일반인은 함부로 못 들어가는 곳이다.

 

 

 

'저것 보러 갈 수 있니?‘

 

 

 

지네들 하고 가면 들어 갈 수 있단다.

 

 

 

차 랜트비 하고 검문소 통과비 120불 달란다

 

죽기전에 한 번만 꼭 보고 싶었던 눈 표범,

 

 

 

천산산맥과 힌두쿠시 산맥파미르 고원 둘래.에서만 몇 마리 발견되었으며 

사진 촬영도 몇 번 할 수 없었던 신비의 눈 표범.

저 눈 표범을 지키고자 눈 표범만을 위한 보호 프로젝트와 후원 가들이 있다는데.

 

 

 

120불 아끼지 말고 다녀와야지... 낼 장동건이 건너오면 의논 해보자.

 

 

 

나른 한 오후 침대에 누워 책 보다가 잠이 든 것 같은데 영민이가 방문을 두들긴다.

 

 

 

잠결에 뛰어 나가니 

이곳 올 때 데려다 주신 출입국 사무소의 국장님께서 직원 한 분과 오신 것이다,

 

그 날처럼 제복은 입지 않으셨고 전통 옷 차림이셨다

 

이곳에 볼일이 있어 오셨다가 다른 일 또 보아야 한신단다. 


이곳의 모든 사람들은 전통 옷이다.

 

간혹 젊은 청년들이나 청바지 티셔츠를 입지만

남자의 윗도리는 무릎까지 내려오고 바지는 헐렁한 몸빼 바지 비슷하다

여자들의 옷차림도 그러하고 머리는 늘 가리어져 있다.

 

 

 

너무나 반가웠다

 초라한 숙소가 약간은 창피 하였지만 뭐 그리 소중 한 일은 아닐 것이고

 

 

 

내가 아는 영어를 총 동원 하여 말하여 보지만 무슨 이야기가 통 할까?

 

 

 

한국 커피 드실래요?’

아껴서 그녀가 오면 먹을라고몇 개 남겨 두었던 커피를 꺼내 보였다.

 

 

 

베란다에 가만히 앉아서 경치만 두루 살피다가

어제 노트에 메모 해 두었던 눈 표범을 보여 주었더니

Snow Leapord

정말 그 곳에 있단다.

 

 

 

나는 그 눈 표범 간절히 보고 싶어요차 랜탈비와 검문소 통과비 120 달러래요;’

 

 

 

아마도 그렇게 받을거야.

낼 소스트로 와라 그러면 내가 암 일 없이 보도록 해 줄게. ‘

 

 

 

그날 돈 들이 지 않고 이곳 까지 델다 주시고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할텐데. 

드릴게 없어 우왕좌왕 하다가 서안 야시장에서 샀던 팔찌를 드렸다.

 

 

 

빨간 팔찌는 마구 찍어 대어 만든 것이 아니고

손 수 작업으로 만드는 자칭 아티스트의 작품 이였는데

너무 예쁘고 귀하게 보여서 5개를 쌌었고 

유 박사님 먼저 한국 갈 때 미리 보냈는데 어째

한 개가 배낭에 돌아다니고 있었다.

 

 

 

길깃의 집에서 소스트 사무실로 들어가시는 길인데 

발티트 포트 사무실에 일 보고 가셔야 하시면서 금방 일어나신다.

 

!

난 내일 눈 표범을 본다.

 

 

 

아침 일찍 가리라. 

 

 

 

꿈에 그리던 눈 표범을 보러 간다

정말 살아 생전 보게 되리라 몰랐었다,

 

너무 너무 보고 싶었던 눈 표범..

 

아프리카에서

세렝케티, 초베, 야토샤, 오카방고, 오롱고 롱고 등에서 수 많은 종류의 동물들을 

보았지만 눈 표범은 만큼은 나의 우상이였다. 

 

 

 

캄캄한 베란다에 나갔다.

계곡에서는 소리 없는 바람이 불어온다.

 

아래 위 층 중

내 방만 빼고 여행객들은 방은 모조리 불이 꺼져 있다.

 

젊은 여행객들은 이 좁은 훈자의 어는 곳에서 야밤에 돌아 뎅기는 지,

밤늦게야 들어온다.

 

 

 

바람의 계곡 나우시까


사춘기를 벗어나 20 대 초반에 들어 섰을 때

미야자끼 하야오의 '미래 소년 코난'은 다시 어린 아이로 돌아가게

하였었다.

 

여러작품을 거쳐 6년후 만든 작품

 

'바람의 계곡 나우사까' 의 장소를 헌팅 할때

그는 이곳에서 훈자의 바람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이곳을 먼저 보고 그 작품을 썼으리라.

훈자 계곡의 신비한 풍광은 미야자끼 하야오의 예술성에

또 하나의 작품을 더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소왕국을 구하기 위한 주인공 나우시까의  헌신한 것을 

설산과 바람을 보면서 스토리를 엮어 갔겠지. 

 

 

 

흐르는 은하수의 무리에 별 들은 총 총 빛나고

초승달은 가늘게 떠 맑은 빛을 밝히며 훈자의 밤하늘을 적시었고

내 가슴은 눈 표범을 향해 흥분에 뛰고 있었다.

 

-오늘 눈 표범을 보고 왔습니다.! 시간 내어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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